명인전 (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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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인전(쇼기)은 일본 장기(쇼기)의 주요 타이틀 중 하나로, 명인과 도전자 간의 7번기 대국으로 진행된다. 명인전의 예선인 순위전에서 A급 순위전 우승자가 도전자 자격을 얻는다. 명인전은 초기에는 2년 주기로 개최되었으나, 순위전 도입 이후 1년 주기로 변경되었으며, 주최사는 매일신문사와 아사히신문사가 번갈아 맡고 있다. 명인 자리를 5번 이상 획득한 기사는 은퇴 후 영세 명인 칭호를 얻을 수 있다. 명인전은 방송 중계 및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널리 시청되고 있으며, 1976년 주최사 변경 문제와 2006년 주최사 재변경 문제 등과 관련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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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전 (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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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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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타이틀전 |
개최 시기 | 4월 - 6월 |
최초 개최 | 1935년~1937년 (제1기 명인 결정 대기전은 2년간) |
제한 시간 | 9시간 (2일제) |
번승부 | 7번승부 |
주최 | 마이니치 신문사 아사히 신문사 일본 장기 연맹 |
협찬 | 다이와 증권 그룹 본사 |
URL | 명인전・순위전:일본 장기 연맹 |
종류 | 명인 |
전기 우승자 | 후지이 소타 (제82기) |
영세 자격 | 기무라 요시오 (14세 명인) 오야마 야스하루 (15세 명인) 나카하라 마코토 (16세 명인) 다니가와 고지 (17세 명인) 모리우치 도시유키 (18세 명인 자격) 하부 요시하루 (19세 명인 자격) |
최다 우승 | 오야마 야스하루 (18기) |
최장 연패 | 오야마 야스하루 (13연패) |
기전 정보 | |
기전 종류 | 타이틀전 |
창설 | 1935년 |
개최 시기 | 타이틀전: 4월 - 6월 예선(순위전): 6월 - 다음 해 3월 |
제한 시간 | 타이틀전: 9시간 (이틀제) 예선(순위전): 6시간 |
결승 | 도전 7번기 |
주최 | 아사히 신문사 마이니치 신문사 |
웹사이트 | 명인전・순위전:일본 장기 연맹 |
최다 우승 | 오오야마 야스하루 (18기) |
최다 연패 | 오오야마 야스하루 (13연패) |
영세 자격자 | 기무라 요시오 (14세 명인) 오오야마 야스하루 (15세 명인) 나카하라 마코토 (16세 명인) 타니가와 코지 (17세 명인) 모리우치 토시유키 (18세 명인) 하부 요시하루 (19세 명인) |
우승자 | 와타나베 아키라 (제78기 명인) |
2. 역사
명인전은 다른 타이틀전과 달리 순위전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여 도전자를 선발하고, 도전자와 타이틀 홀더 간의 7번기 승부만을 명인전이라고 부른다.
에도 시대 이후 근대까지 장기 명인은 세습제(혈연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가원제·추천제)였다. 1929년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 「제1회 일본장기선수권전」 설문조사에서 당시 명인 세키네 긴지로는 “나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적절한 시기에 은퇴하고 싶다”고 답했다.[1]
이후, 일본장기연맹 고문 나카지마 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1934년 도쿄 니치니치 신문 학예부장 아베 신노스케가 바둑과 장기의 “실력 명인전”을 기획했고,[2] 1935년 일본장기연맹 회장 카네나시 지로는 “300년간 이어진 종신 명인 제도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명인전(처음에는 8단 9명의 리그전)이 시작되었다.
1937년 12월 6일 기무라 요시오가 하나다 조타로를 이기고 초대 실력제 명인으로 결정되었다. 1938년 2월 11일, 13세 명인 세키네 긴지로는 명인 자리를 반납했고, 기무라 요시오가 실력제 명인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오하시 소케이 초대 명인 이후로 이어져 온 종신 명인제가 폐지되고, 단기 실력제 명인 제도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1기가 2년이었으며, 2년에 걸쳐 도전자를 결정하고 짝수 해에 타이틀 매치를 개최했다. 그러나 1937~38년(제1기 명인전), 1943~44년(제4기), 1945~46년(제5기)에는 도전자 부재 등의 이유로 타이틀 매치가 개최되지 않았다.
제5기까지의 명인전에서는 각 기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도전자 결정 리그의 개최 방식이 변경되었다. 1946년에 순위전이 시작됨에 따라 제6기 명인전 이후(1947년 이후)는 1기가 1년이 되었고, 도전자 결정 방법도 고정되었다.
명인전은 1937년 실력제 도입 이후 주최사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935년, 종신 명인제 폐지 후 실력제 명인전이 시작되면서 도쿄 니치니치 신문이 주최하였다.[2] 1949년, 마이니치 신문사와의 협상 결렬로 아사히 신문사가 명인전 주최를 맡게 되었다.[35] 명인전을 잃은 마이니치 신문사는 왕좌전을 창설하여 현재까지 주최하고 있다.
1976년, 일본장기연맹은 아사히 신문사에 계약금 대폭 인상을 요구했으나, 협상이 결렬되면서 마이니치 신문사가 다시 명인전 주최를 맡게 되었다.[37] 2006년, 일본장기연맹은 다시 아사히 신문사로 주최사 이관을 추진하면서 마이니치 신문사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양측의 합의를 통해 2007년부터 마이니치 신문사와 아사히 신문사가 공동 주최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43]
2. 1. 실력제 명인
명인과 도전자 간에 벌어지는 7번기(七番勝負) 대국을 말한다. 명인전 7번기 승자에게는 일본 장기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가원제(家元制)로 에도 시대 초기 1612년(慶長年間)부터, 실력제 타이틀로는 1937년부터 이어지는) 「명인」의 칭호가 주어지며, 다음 7번기가 끝날 때까지 그 타이틀을 보유하게 된다. 매일신문사와 아사히신문사가 공동 주최(2007년도부터)하고, 다이와 증권 그룹이 후원한다(2005년도부터).에도 시대 이후 근대까지 장기 명인은 세습제(世襲制)(단, 혈연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가원제·추천제)였다.
1929년, 요미우리 신문사가 주최한 「제1회 일본장기선수권전(日本将棋選手権戦)」을 앞두고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당시 명인 세키네 긴지로는 “옛부터 명인의 자리는 평생 동안 유지되는 것이지만, 나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적절한 시기에 은퇴하고 싶다”고 답했다.[1] 당시 세키네 긴지로는 “명인”이 아닌 “9단 제도”를 생각하고 있었다.[1]
이후, 일본장기연맹 고문 나카지마 후지(中島富治)의 제안을 받아들여, 1934년(쇼와 9년), 도쿄 니치니치 신문 학예부장 아베 신노스케(阿部眞之助)가 바둑과 장기의 “실력 명인전”을 기획했고,[2] 일본장기연맹 회장 카네나시 지로(金易二郎)는 1935년 3월에 “300년간 이어진 종신 명인 제도를 폐지한다”(쇼와 12년(1937년))고 발표했다. 같은 해, 명인전(처음에는 8단 9명의 리그전)이 시작되었다. 2년에 걸친 “제1기 명인 결정 대기전” 결과, 1937년 12월 6일 기무라 요시오가 하나다 조타로를 이기고, 예정되어 있던 다음 해 결승 6번기를 치르지 않고 초대 실력제 명인으로 결정되었다. 1938년 2월 11일(당시 공휴일·기원절[3]), 13세 명인 세키네 긴지로는 1935년에 제출한 성명서에 따라 명인 자리를 반납했고, 기무라 요시오가 실력제 명인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오하시 소케이 초대 명인 이후로 이어져 온 종신 명인제가 폐지되고, 단기 실력제 명인 제도가 시작되었다. 바둑은 명인전이 아닌 본인방전으로 1939년에 시작되었다.[4]
2. 1. 1. 초기 명인전 (1기 ~ 5기)
초기에는 1기가 2년이었으며, 2년에 걸쳐 도전자를 결정하고 짝수 해에 타이틀 매치를 개최했다. 그러나 1937~38년(제1기 명인전), 1943~44년(제4기), 1945~46년(제5기)에는 도전자 부재 등의 이유로 타이틀 매치가 개최되지 않았고, 제1기(1937~38년) 및 제5기(1945~46년)에서는 1년 차인 홀수 해에 명인이 결정되었다.[9][10][11][12][13]제5기까지의 명인전에서는 각 기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도전자 결정 리그의 개최 방식이 변경되었다.
1946년에 "명인전" 예선으로 실질적으로 위치 지워지는 순위전이 시작됨에 따라, 제6기 명인전 이후(1947년 이후)는 1기가 1년이 되었고, 도전자 결정 방법도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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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
! 방식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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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기
(1938년,
개최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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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최고 단위였던 8단의 모든 기사가 명인 후보자 결정 리그에 참가했다.
- 리그를 통과한 명인 후보자 2명이 6번기(3승 3패의 경우 후보자 결정 리그 1위가 명인)로 겨루었다.
- 1935년부터 2년간 리그를 진행하고 1937년에 번수(番勝負)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신다 사건'''으로 인해 리그가 6개월간 중단되어 번수(番勝負)는 1938년으로 변경되었다.
- 명인 후보자 결정 리그 초기 참가자(8단): 토이 이치타로, 오사키 구마오, 가네이 지로, 키미 킨지로, 하나다 쵸타로, 키무라 요시오, 카네코 킨고로(8단 승단일 순) 7명.
- 칸다 타츠노스케의 8단 승단(즉 리그 참가권) 여부를 둘러싸고 혼란이 발생하여, 칸다의 승단을 주장하는 기사들이 일시적으로 연맹에서 탈퇴했다.
- 연맹은 칸다 타츠노스케의 8단 승단을 추인하여 결착했고, 칸다 타츠노스케와 하기와라 준 8단 2명이 추가되어 9명으로 리그를 진행했다.
- 명인 후보자 결정 리그는 8단 전 기사가 총돌이로 2국씩 두는 특별 리그전 결과와, 일반적인 기전에서의 8단·7단전(보통전) 결과를 각각 점수로 환산하여 합산, 순위를 결정했다(보통전에서는 승패뿐만 아니라 상대의 단위와 수합에 따라 점수가 정해졌다).
- 후보자 결정 리그에서 1위와 2위의 점수 차가 8점을 넘는 큰 차이가 났을 경우, 2위는 후보자 자격을 잃고 번수(番勝負)를 실시하지 않고 1위가 명인이 되었다.
- 제1기 리그의 점수가 40점을 밑도는 기사는 차기(제2기) 도전자 결정 리그 참가권이 정지되었다(제3기부터 복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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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12월 5일부터 12월 6일의 최종국에서 키무라 요시오가 하나다 쵸타로에게 승리했다.
- 리그전 성적은 키무라 요시오와 하나다 쵸타로가 13승 2패로 동률이었지만, 점수는 1위 키무라 103.7점, 2위 하나다 95.6점으로 8.1점 차이가 나서 규정에 따라 번수(番勝負)는 실시되지 않고 키무라 요시오가 명인이 되었다.
- 1938년 2월 11일에 키무라 요시오의 명인 취임식이 실시되었다.
- 키미 킨지로와 오사키 구마오는 규정의 40점을 밑돌아 제2기 도전자 결정 리그 참가 자격을 잃었다. 오사키 구마오는 질병으로 중도 기권, 제2기 리그 도중 사망했다.
- 키미 킨지로는 규정에 따라 제3기부터 리그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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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기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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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에도 친숙한 도전자 결정 리그에서 선출된 도전자가 7번기로 명인에게 도전하는 형식이 되었다.
- 도전자 결정 리그 참가 자격: 전기 리그에서 40점 이상을 획득한 명인을 제외한 8단 6명, 신8단 1명, 8단급으로 특례로 참가가 인정된 阪田(坂田) 三吉(명인 칭호 문제로 그때까지 연맹에 소속되지 않았음), 7단 전원에 의한 예선(총당 2국씩)을 통과한 1명. 총 9명.
- 도전자 결정 리그는 제1기에 있던 보통전이 폐지되었고, 총당 리그전을 2회(제1차·제2차) 실시하여, 그 합계의 승패로 도전자를 결정했다.
- 제1차 리그에서 1승 이하의 성적을 거둔 하나다 쵸타로는 제2차 리그에 참가할 수 없었고, 실격되었다.
- 번승부는 제한 시간 각 15시간의 3일제로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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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이 이치타로가 13승 0패로 명인 도전을 결정했지만, 번승부에서 키무라 요시오에게 패했다.
- 특례로 참가한 阪田(坂田) 三吉는 7승 8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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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기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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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자 결정 리그는 8단의 전 기사 10명에, 5단~7단의 예선을 통과한 2명을 더하여 12명으로 실시되었다.
- 2단계의 리그전을 통해 도전자가 결정되었다.
- 1단계: 12명을 4명씩 3조로 나누어 리그전 실시.
- 2단계: 각 조의 1위 3명(토이 이치타로, 칸다 타츠노스케, 와타나베)에 각 조 2위 4명에 의한 패자 부활 리그를 통과한 1명(쓰카다 마사오)을 더하여 총 4명이 결승 리그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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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승 리그를 제압한 칸다 타츠노스케가 도전자가 되었지만, 번승부에서 키무라 요시오에게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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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기
(1944년,
개최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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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자 결정전은 8단의 전 기사 12명에, 5단~7단의 예선을 통과한 4명까지 총 16명으로 실시되었다.
- 반년마다(2년이므로 합계 4회) 예비 자격자 결정 토너먼트를 실시했다.
- 각 토너먼트의 승자가 예비 자격자로서 명인(키무라 요시오)과 반향낙(향낙과 평수를 번갈아 두는)의 수합으로 예비 수합 3번기를 싸우고, 이기면 명인 도전자로서 다시 명인전 7번기로 진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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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비 수합은 4회 모두 키무라 요시오의 승리가 되어, 명인 도전 자격자가 나오지 않았고, 7번기를 실시하지 않고 키무라 요시오가 방어했다.
연도 |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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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전기 | 키무라 요시오 2-0 하기와라 쥰 |
1943년 후기 | 키무라 요시오 2-1(1천일수) 오오노 겐이치 |
1944년 전기 | 키무라 요시오 2-0 하나다 쵸타로 |
1944년 후기 | 키무라 요시오 2-0 사카구치 마사히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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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기
(1946년,
개최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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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하에 따라 토너먼트가 폐지되었고, 최근의 성적에 따라 예비 자격자 7명이 선출되었다.
- 이 7명이 순서대로 키무라 요시오와 예비 수합 3번기를 실시하고, 이긴 자가 정식 도전자로서 명인전 7번기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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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격화에 따라 예비 수합이 중지되었고, 특례로 키무라 요시오의 명인 방어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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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2. 순위전 도입 이후 (6기 ~ 현재)
초기에는 1기가 2년이었으며, 2년에 걸쳐 도전자를 결정하고 짝수 해에 타이틀 매치를 개최했다. 그러나 1937~38년(제1기 명인전), 1943~44년(제4기), 1945~46년(제5기)에는 도전자 부재 등의 이유로 타이틀 매치가 개최되지 않았고, 제1기(1937~38년) 및 제5기(1945~46년)에서는 1년 차인 홀수 해에 명인이 결정되었다.[1]제5기까지의 명인전에서는 각 기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도전자 결정 리그의 개최 방식이 변경되었다.[1]
순위전이 1946년에 시작됨에 따라 제6기 명인전 이후(1947년 이후)는 1기가 1년이 되었고, 도전자 결정 방법도 고정되었다.[1]
2. 2. 주최사 변동
명인전은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쇼기 타이틀전으로, 1937년 실력제 도입 이후 주최사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1935년, 종신 명인제 폐지 후 실력제 명인전이 시작되면서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이 주최하였다.[2]
1949년, 마이니치 신문사(毎日新聞社)와 일본장기연맹 간의 협상 결렬로 인해 아사히 신문사(朝日新聞社)가 명인전 주최를 맡게 되었다.[35] 명인전을 잃은 마이니치 신문사는 왕좌전을 창설하여 현재까지 주최하고 있다.
1976년, 일본장기연맹은 아사히 신문사에 계약금 대폭 인상을 요구했으나, 협상이 결렬되면서 마이니치 신문사가 다시 명인전 주최를 맡게 되었다.[37] 이 과정에서 임시 기사총회 투표 결과 2표 차이로 이적이 승인되는 등[37] 혼란이 있었다. 아사히 신문사는 아사히 아마 명인전과 아사히 오픈 장기 선수권을 주최하며 아마추어 장기 발전에 힘썼다.
2006년, 일본장기연맹은 다시 아사히 신문사로 주최사 이관을 추진하면서 마이니치 신문사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양측의 합의를 통해 2007년부터 마이니치 신문사와 아사히 신문사가 공동 주최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다.[43] 짝수 기에는 "아사히 신문사, 마이니치 신문사" 순서, 홀수 기에는 "마이니치 신문사, 아사히 신문사" 순서로 표기한다.[43]
3. 방식
명인전은 명인과 도전자 간의 7번기로 진행된다. 다른 타이틀전과 달리 도전자를 선발하기 위한 대회는 순위전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며, 도전자와 타이틀홀더의 7번기 승부만을 명인전이라고 부른다.
7번기 승자에게는 일본 장기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명인' 칭호가 주어지며, 다음 7번기가 끝날 때까지 그 타이틀을 보유한다.[1] 7번기는 전국 각지의 여관이나 요정, 문화 시설 등 고풍스러운 장소에서 열리며, 제66기(2008년) 이후로는 제1국을 도쿄도 분쿄구의 춘산장에서 열고, 제2국~제5국은 전국의 지자체 공모를 통해 개최지가 결정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5]
제한 시간은 2일제 각 9시간으로, 이는 일본 장기의 모든 타이틀전 중 가장 긴 시간이다. 1일차가 끝날 때는 봉수를 하여 2일차 시작까지 다음 수를 생각하여 유리하게 되는 것을 방지한다. 점심 휴식(양일 모두)은 12시부터 1시간, 저녁 휴식(2일차만)은 17시부터 30분간(모두 제80기부터)이다.[6]
초기에는 1기가 2년이었으며, 2년에 걸쳐 도전자를 결정하고 짝수 해에 타이틀 매치를 개최했다. 그러나 1937~1938년(제1기 명인전), 1943~1944년(제4기), 1945~1946년(제5기)에는 도전자 부재 등의 이유로 타이틀 매치가 개최되지 않았다.
제2기부터 제5기까지는 도전자 결정 리그의 개최 방식이 매 기마다 변경되었다.
기 | 방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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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1940년) | 제한 시간 각 15시간의 3일제였다.[12] | |
제3기(1942년) | ||
제4기(1944년, 개최되지 않음) | 예비 수합은 모두 키무라 요시오 명인의 승리로 끝나 도전자 없이 7번기가 개최되지 않았다. | |
제5기(1946년, 개최되지 않음) | 전쟁 격화로 예비 수합이 중지되었고, 특례로 키무라 요시오 명인이 방어했다.[13] |
1946년에 순위전이 시작됨에 따라 제6기 명인전(1947년) 이후부터는 1기가 1년이 되었고, 도전자 결정 방법도 고정되었다.
3. 1. 순위전
명인전의 예선에 해당하는 기전을 「순위전」이라 칭하며, 5개의 클래스로 나뉜 최상위 클래스인 A급 순위전의 우승자가 명인전의 도전자가 된다.[12] 순위전의 시간제한은 각 6시간(A급 이외는 체스 클록 방식)이다. 초기에는 1기가 2년이었으며, 2년에 걸쳐 도전자를 결정하고 짝수 해에 타이틀 매치를 개최했다. 그러나 1937-38년(제1기 명인전), 1943-44년(제4기), 1945-46년(제5기)에는 도전자 부재 등의 이유로 타이틀 매치가 개최되지 않았고, 제1기(1937-38년) 및 제5기(1945-46년)에서는 1년 차인 홀수 해에 명인이 결정되었다.제5기까지의 명인전에서는 각 기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도전자 결정 리그의 개최 방식이 변경되었다.
“명인전” 예선으로 실질적으로 위치 지워지는 “순위전”이 1946년에 시작됨에 따라, 제6기 명인전 이후(1947년 이후)는 1기가 1년이 되었고, 도전자 결정 방법도 고정되었다.
- 제6기(1947년)
- 전년부터 순위전이 시작되어 A급 순위전 우승자가 명인 도전권을 얻게 되었다.
- 이 해 A급 순위전은 8단 기사 14명이 참가하는 리그전(제한 시간 각 7시간)으로 치러졌으며, 순위가 결정되지 않아 동률 1위가 된 쓰카다 마사오, 오노 겐이치, 하기와라 준 3인의 플레이오프가 실시되어 쓰카다가 도전권을 얻었다.
- 이 기수부터 타이틀전 시스템이 종전의 3일제에서 “제한 시간 각 8시간의 1일제”로 변경되었다(봉수는 없었다).[12]
- 제7기(1948년) - 제9기(1950년)
- 순위전 A급 상위 3명과 B급 우승자 1명을 포함한 4명이 파라마스식 토너먼트를 실시하여(A급 3위와 B급 우승자가 대국하고, 승자가 A급 2위와, 그 승자가 A급 1위와 대국하는 방식) 토너먼트 우승자가 명인 도전권을 얻었다.
- 제7기에서는 제2기 순위전에서 B급 7단이었던 오야마 야스하루가 파라마스식 토너먼트를 뚫고 도전권을 얻어 명인전 최초의 7단 도전자가 되었다.
- 1949년 순위전 실행 중에 일본장기연맹과 마이니치신문사의 협상이 결렬되어 제9기부터 명인전 주최가 아사히신문사가 되었다.[14]
- 또한 제9기부터 타이틀전 시스템이 “제한 시간 각 10시간의 2일제”로 다시 변경되었다.[15]
- 제10기(1951년) - 제26기(1967년)
- -- A급 순위전 우승자가 도전권을 얻도록 개정되었다.
- 제11기 제2국은 애기가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이 관전했다.
- 제27기(1968년) -
- 제한 시간을 “순위전은 각 6시간, 타이틀전은 각 9시간”으로 단축했다. 이후 현재까지 거의 같은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3. 2. 명인전 7번기
명인과 도전자 간의 7번기(七番勝負) 대국을 말한다. 명인전 7번기 승자에게는 일본 장기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가원제(家元制)로 에도 시대 초기 1612년(慶長年間)부터, 실력제 타이틀로는 1937년부터 이어지는) 「명인(名人)」의 칭호가 주어지며, 다음 7번기가 끝날 때까지 그 타이틀을 보유하게 된다.[1] 매일신문사와 아사히신문사가 공동 주최(2007년도부터)하고, 다이와증권그룹(大和証券グループ)이 후원한다(2005년도부터). 다른 타이틀전과 달리 도전자를 선발하기 위한 대회는 순위전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고, 도전자와 타이틀홀더의 번기승부 만을 명인전이라고 부른다.명인과 도전자(A급 순위전 우승자)가 7번기를 벌인다. 7번기는 전국 각지의 여관이나 요정, 또는 문화 시설 등 고풍스러운 장소에서 열린다. 제66기(2008년) 이후로는 제1국을 도쿄도 분쿄구의 춘산장에서 열고, 제2국~제5국은 전국의 지자체 공모를 통해 개최지가 결정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5]
제한 시간은 2일제 각 9시간으로, 이는 일본 장기의 모든 타이틀전 중 가장 긴 시간이다. 1일차가 끝날 때는 봉수를 하여 2일차 시작까지 다음 수를 생각하여 유리하게 되는 것을 방지한다. 점심 휴식(양일 모두)은 12시부터 1시간, 저녁 휴식(2일차만)은 17시부터 30분간(모두 제80기부터)이다.[6] 참고로, 2일차에 저녁 휴식 시간이 있는 것은 2018년 현재 타이틀전 중 명인전뿐이다(1일제 타이틀전에는 왕좌전이 있다). 다만 명인전의 저녁 휴식에 대해, 와타나베 아키라 명인은 "국면이 승부처에 들어가서 타이밍이 나쁘고, 배가 고프면 간식을 먹으면 된다", "신문사 입장에서도 휴식 없이 하는 편이 도움이 된다(다음날 아침 신문에 기사를 제때 실을 수 있다)는 것이므로 누가 이득인지 모르겠다"라며 "저녁 휴식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7]
4. 역대 7번기 결과
기 | 연도 | 우승자 | 전적 | 준우승자 | 비고 |
---|---|---|---|---|---|
1 | 1937 1938 | 키무라 요시오 | - | - | 명인 후보 2인을 정하는 리그전에서 1위 키무라와 2위 하나다의 성적이 크게 차이나 1938년에 예정된 번기승부를 취소하고 키무라가 명인으로 결정 |
2 | 1939 1940 | O千X | 도이 이치타로 | ||
3 | 1941 1942 | O | 칸다 타츠노스케 | ||
4 | 1943 1944 | - | - | 토너먼트로 선발된 4명의 예비자격자가 키무라에게 기물을 접히고 예비대국을 치러서 도전자를 결정할 계획이었으나 예비대국에서 키무라가 전승, 도전자 획득자가 없었던 관계로 번기승부 없이 키무라의 방어 결정 | |
5 | 1945 1946 | - | - | 근년의 성적으로 예비자격자를 선발하였으나, 전쟁으로 예비시합이 중지되어 번기승부도 취소. 특례로 키무라의 방어 인정[19], 키무라 14세 명인 자격 획득 | |
6 | 1947 | 츠카다 마사오 | X持O千O千O | 키무라 요시오 | |
7 | 1948 | XOX千 | 오오야마 야스하루 | ||
8 | 1949 | 키무라 요시오 | XOO | 츠카다 마사오 | 5번기로 진행 |
9 | 1950 | OXO | 오오야마 야스하루 | ||
10 | 1951 | OXOXO | 마스다 코조 | ||
11 | 1952 | 오오야마 야스하루 | XO | 키무라 요시오 | |
12 | 1953 | OXO | 마스다 코조 | ||
13 | 1954 | 千OXO | |||
14 | 1955 | OXOXO | 타카시마 카즈키요 | ||
15 | 1956 | O | 하나무라 모토지 | 오오야마 15세 명인 자격 획득 | |
16 | 1957 | 마스다 코조 | OXOXO | 오오야마 야스하루 | |
17 | 1958 | O持XO | |||
18 | 1959 | 오오야마 야스하루 | 千XO | 마스다 코조 | |
19 | 1960 | XO千O | 카토 히후미 | ||
20 | 1961 | OXO | 마루타 유조 | ||
21 | 1962 | O | 후타카미 타츠야 | ||
22 | 1963 | OXO | 마스다 코조 | ||
23 | 1964 | XOX | 후타카미 타츠야 | ||
24 | 1965 | OXO | 야마다 미치요시 | ||
25 | 1966 | XO | 마스다 코조 | ||
26 | 1967 | OXO | 후타카미 타츠야 | ||
27 | 1968 | O | 마스다 코조 | ||
28 | 1969 | XOXO | 아리요시 미치오 | ||
29 | 1970 | OXO | 나다 렌쇼 | ||
30 | 1971 | OXOX | 마스다 코조 | 최연장 명인 방어 (48세 3개월) | |
31 | 1972 | 나카하라 마코토 | OXOX | 오오야마 야스하루 | |
32 | 1973 | O | 카토 히후미 | ||
33 | 1974 | XOXOXO | 오오야마 야스하루 | ||
34 | 1975 | XO千XO持O | 오오우치 노부유키 | ||
35 | 1976 | OXOXO | 요네나가 쿠니오 | 나카하라 16세 명인 자격 획득 | |
- | 1977 | 스폰서 변경 문제로 인해 중지 | |||
36 | 1978 | XOXO千O | 모리 케이지 | ||
37 | 1979 | XO | 요네나가 쿠니오 | ||
38 | 1980 | OX持O | |||
39 | 1981 | OXO | 키리야마 키요즈미 | ||
40 | 1982 | 카토 히후미 | 持XOO千OX千O | 나카하라 마코토 | |
41 | 1983 | 타니가와 코지 | OXO | 카토 히후미 | |
42 | 1984 | OXO | 모리야스 히데미츠 | ||
43 | 1985 | 나카하라 마코토 | OXO | 타니가와 코지 | |
44 | 1986 | OXO | 오오야마 야스하루 | 최연장 명인도전 (63세 2개월) | |
45 | 1987 | XO | 요네나가 쿠니오 | ||
46 | 1988 | 타니가와 코지 | XOXO | 나카하라 마코토 | |
47 | 1989 | O | 요네나가 쿠니오 | ||
48 | 1990 | 나카하라 마코토 | OXOXO | 타니가와 코지 | |
49 | 1991 | OXO | 요네나가 쿠니오 | ||
50 | 1992 | XOXO | 타카하시 미치오 | ||
51 | 1993 | 요네나가 쿠니오 | O | 나카하라 마코토 | |
52 | 1994 | 하부 요시하루 | OXO | 요네나가 쿠니오 | |
53 | 1995 | OXO | 모리시타 타쿠 | ||
54 | 1996 | OXO | 모리우치 토시유키 | ||
55 | 1997 | 타니가와 코지 | OXOXO | 하부 요시하루 | 타니가와 17세 명인 자격 획득 |
56 | 1998 | 사토 야스미츠 | XOXOX | 타니가와 코지 | |
57 | 1999 | OXO | |||
58 | 2000 | 마루야마 타다히사 | OXO | 사토 야스미츠 | |
59 | 2001 | OX千XOX | 타니가와 코지 | ||
60 | 2002 | 모리우치 토시유키 | O | 마루야마 타다히사 | |
61 | 2003 | 하부 요시하루 | O千O | 모리우치 토시유키 | |
62 | 2004 | 모리우치 토시유키 | OXOXO | 하부 요시하루 | |
63 | 2005 | XOXO | |||
64 | 2006 | OXOXO | 타니가와 코지 | ||
65 | 2007 | XOXO | 고다 마사타카 | 모리우치 18세 명인 자격 획득 | |
66 | 2008 | 하부 요시하루 | XOXO | 모리우치 토시유키 | 하부 19세 명인 자격 획득 |
67 | 2009 | OXOXO | 고다 마사타카 | ||
68 | 2010 | O | 미우라 히로유키 | ||
69 | 2011 | 모리우치 토시유키 | OXO | 하부 요시하루 | |
70 | 2012 | OXOXO | |||
71 | 2013 | OXO | |||
72 | 2014 | 하부 요시하루 | O | 모리우치 토시유키 | |
73 | 2015 | OXO | 나메카타 히사시 | ||
74 | 2016 | 사토 아마히코 | XO | 하부 요시하루 | |
75 | 2017 | XOXO | 이나바 아키라 | ||
76 | 2018 | XOXO | 하부 요시하루 | ||
77 | 2019 | 토요시마 마사유키 | 千O | 사토 아마히코 | |
78 | 2020 | 와타나베 아키라 | OXO | 토요시마 마사유키 | |
79 | 2021 | XO | 사이토 신타로 |
5. 영세 명인
명인 자리를 통산 5기 이상 획득한 기사는 원칙적으로 은퇴 후 영세 칭호인 '''영세 명인'''을 칭할 수 있다.
다른 타이틀의 영세 칭호와 달리, 「○세 명인」이라는 칭호가 된다. 이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지는 종세 명인제를 계승하기 위한 것이며, 첫 영세 명인인 김무라 요시오는 세키네 킨지로 13세 명인 다음이므로 14세 명인을 칭했다.
영세 명인의 자격은 1949년, 명인전 주최자가 다음 해부터 아사히 신문사로 변경됨에 따라 제정되었다.[16] 당시 규약은 명인 5기 이상의 기사가 탈관(失冠)했을 때, 연맹이 그 기사의 인격 등을 심사하여 영세 명인에 적합한 인물이라면 영세 명인의 칭호를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규약 제정 이전인 1945년에 김무라 요시오는 이미 규정된 명인 5기를 달성했으므로, 당연히 이 자격을 얻었고, 1952년에 명인 자리를 잃자 영세 명인에 즉위했다.
참고로, 「김무라의 명인 획득 기수 5기는 1949년에 달성한 것이며, 전전(戰前)의 획득 기수는 실제로는 4기이다」나 「영세 명인의 규약이 만들어진 것은 1952년이다」 등과 같은 오해가 있다. 하지만, 김무라의 명인 획득 기수와 규약 제정 연도와 즉위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오류이다.
이 규정에 따른 영세 명인의 자격 획득자는 김무라 요시오(14세 명인), 오야마 야스하루(15세 명인), 나카하라 마코토(16세 명인), 타니가와 히로시(17세 명인), 모리우치 토시유키(18세 명인), 하부 유지(19세 명인)의 6명이다.
김무라 요시오는 1952년 명인 자리에서 떨어진 후 은퇴하여 14세 명인을 칭했다. 오야마 야스하루는 명인 13연패 등 수많은 위업을 기념하여 특례로 현역임에도 불구하고 15세 명인을 칭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나카하라 마코토는 2007년 11월, 명인 15기 등의 실적을 기념하여 현역 중에 16세 명인으로 추대되었다. 타니가와 히로시는 2022년 4월 환갑을 맞이한 것과 지금까지의 실적·장기계에 대한 공헌을 통해 추천을 받아 현역 중 17세 명인에 즉위했다. 2022년 현재, 모리우치 토시유키, 하부 유지는 아직 즉위하지 않았다. 규정대로 은퇴 후 영세 명인을 칭한 것은 김무라 요시오만이다.
6. 명인전과 관련된 논란
2006년 3월, 일본장기연맹 이사회는 제66기(2008년) 이후의 명인전 주최를 아사히 신문사로 이관한다는 방침을 제시하고, 당시 주최사였던 마이니치 신문사에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는 통지서를 발송했다. 사전 협의 없이 내려진 이사회의 결정에, 오랫동안 명인전을 통해 장기계를 발전시켜 온 마이니치 신문사는 격분했고, 큰 문제가 되었다.[43]
나카하라 마사루 전무이사(부회장)가 마이니치 신문사와의 직접 협상 과정에서 "명인전은 아사히로 옮겨가지만, 왕장전을 더욱 발전시켜 주길 바란다"는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은 문제가 커진 요인 중 하나였다. 이후, 요네나가 쿠니오 회장은 나카하라 담당의 험담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양측의 오해가 있었다는 해명을 했다. 요네나가 회장은 도쿄 중일 스포츠 신문의 연재 칼럼에서 "마이니치 신문사에 통지서를 보낸 것은, 현행 계약 조건을 변경하려는 경우에도 통지서를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아사히 신문사로의 이관이 전제된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일본장기연맹의 예산은 현재 매년 약 1억엔 정도 적자가 발생하고 있어, 재정 체질 개선을 위해서도 계약의 재검토가 필요했다"고 언급했지만, 마이니치 신문사 측은 "장기연맹은 오랫동안 충분한 계약금을 받으면서 재정 개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고, 돈이 궁핍해져서 신의를 버리고 전통을 파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43]
이후의 자세한 전개 과정은 #2006년 주최사 재변경 문제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6. 1. 1976년 주최사 변경 문제
1976년, 일본장기연맹은 명인전 계약금을 전년 1억 1천만 엔에서 3억 엔(명인전 2억 엔, 순위전 1억 엔)으로 대폭 인상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당시 바둑 최고위 기전인 기성전의 계약금이 1억 6천만 엔이었기 때문에, 바둑에 대항하여 그 이상의 금액으로 계약을 체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아사히신문사는 이 요구를 거부하고, 전년과 같은 1억 1천만 엔에 일시금 1천만 엔을 더한 1억 2천만 엔을 제시했다. 연맹은 요구액을 1억 6천만 엔으로 낮췄지만, 양측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같은 해 7월 계약은 해지되었다.
이후 8월 14일에 연맹의 공식 제안을 받은 마이니치신문사가 협상에 참여했고[37], 9월에는 계약금 2억 엔으로 1977년부터 명인전 주최를 담당하기로 결정되어, 연맹과 마이니치신문 간에 임시 계약이 체결되었다[36].
임시 계약 직후 열린 임시 기사총회에서 마이니치신문으로의 이적 찬반 투표가 실시되었는데, 56표 대 54표, 단 2표 차이로 이적이 승인되었다[37]. 당초 예상보다 반대표가 많았는데, 이는 투표 전 순위전(당해 중단)을 대체할 임시 승급 기전을 요구했던 젊은 기사들이 임시 기전 실시가 부결되자 반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약 문제 해결에 시간이 걸리면서, 차기 명인전 제36기 7번 승부는 원래 예정(1977년 4월 시작)보다 1년 가까이 늦은 1978년 3월에 시작되었다. 또한 순위전은 "제30기" 종료(1976년 3월)부터 9개월의 공백 기간을 거쳐 "제36기"가 1년이 넘는 일정(1977년 1월부터 1978년 2월까지)으로 실시되어, 순위전 회차가 명인전과 일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77년에는 명인전이 실시되지 않았다.
제36기 명인전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남자, 마이니치신문사는 "명인전 복귀 기념 특별 기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10월 5일부터 은퇴·휴장자를 제외한 역대 명인과 도전자 11명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쟁하게 되었다[37].
한편, 명인전을 잃은 아사히신문사(학예부)는 「근대장기 1976년 12월호」에서 "앞으로는 아마추어 장기의 발전과 보급에 힘쓸 것이다", "언젠가 아마추어 장기 전국 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라고 밝혔고[38], 이후 1977년부터 "아사히 아마 명인전"을, 1982년부터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2000년 이후는 아사히 오픈 장기 선수권, 2006년 종료)를 주최하고 있다.
1991년 11월경, 일본장기연맹 이사회에서 명인전을 아사히신문사로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실현되지 않았다[39].
6. 2. 2006년 주최사 재변경 문제
2006년 3월, 일본장기연맹 이사회는 제66기(2008년) 이후의 명인전 주최를 아사히 신문사로 이관한다는 방침을 제시하고, 당시 주최사였던 마이니치 신문사에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는 통지서를 발송했다. 사전 협의 없이 내려진 이사회의 결정에, 오랫동안 명인전을 통해 장기계를 발전시켜 온 마이니치 신문사는 격분했고, 큰 문제가 되었다.[43]마이니치 신문사와의 직접 협상을 담당한 나카하라 마사루 전무이사(부회장)가 "명인전은 아사히로 옮겨가지만, 왕장전을 더욱 발전시켜 주길 바란다"는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커진 요인 중 하나였다. 이후, 요네나가 쿠니오 회장은 나카하라 담당의 험담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양측의 오해가 있었다는 해명을 했다. 요네나가 회장은 도쿄 중일 스포츠 신문의 연재 칼럼에서 "마이니치 신문사에 통지서를 보낸 것은, 현행 계약 조건을 변경하려는 경우에도 통지서를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아사히 신문사로의 이관이 전제된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일본장기연맹의 예산은 현재 매년 약 1억 엔 정도 적자가 발생하고 있어, 재정 체질 개선을 위해서도 계약의 재검토가 필요했다"고 언급했지만, 마이니치 신문사 측은 "장기연맹은 오랫동안 충분한 계약금을 받으면서 재정 개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고, 돈이 궁핍해져서 신의를 버리고 전통을 파는 것인가"라고 비판했다.[43]
2006년도 명인전 계약액은 3.34억엔이었던 데 반해, 아사히는 3.51억엔, 그 외 임시 기전 4000만엔, 보급 협력금 1.5억엔으로 5년 계약을 제시했다고 한다.
마이니치는 통지 철회를 요구했고, 연맹은 일시적으로 마이니치・아사히의 공동 주최를 제안하는 등의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5월에 보충 설명서를 마이니치에 보냈다. 마이니치는 이를 통지 철회로 간주하고 계약 재검토 협의에 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열린 기사 총회에서는 다음의 안건이 표결되었다.
(1)마이니치가 단독 계약을 원하는 경우, 마이니치가 제시한 계약 조건을 수락할지 여부를 기사들의 투표로 결정
(2)마이니치가 아사히와의 공동 주최를 원하는 경우, 협상은 이사회에 일임[43]
7월 10일, 마이니치는 단독 주최에 의한 7년 계약(1년차는 3.35억엔, 2년차 이후는 매년 협의, 그 외 장기 진흥금으로 매년 3000만엔)을 제시했다. 이는 일반적인 기전 계약(3년)과 비교해 이례적인 장기 제안이었다. 하부 요시하루(당시 왕위・왕좌・왕장)는 대국 종료 후 인터뷰에서, 모리우치 토시유키(당시 명인・기왕)는 명인 취임식 자리에서, 와타나베 아키라(당시 용왕)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각각 마이니치 안을 지지한다는 것을 표명했다.[43]
8월 1일 임시 기사 총회가 개최되어 마이니치 안에 대한 표결 결과, 찬성 90표, 반대 101표로 마이니치 안을 수락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찬반 차이가 적었기 때문에 아사히는 마이니치와의 공동 주최를 제안했다. 9월 19일, 마이니치는 공동 주최에 대한 협의를 시작하는 것을 받아들였고, 11월 1일에 공동 주최에 관한 기본 사항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43]
12월 27일, 마이니치・아사히 양 신문사와 일본장기연맹 간에 계약금 등에 대해 합의되었다. 명인전・순위전은 5년 계약, 계약금은 양사 합쳐 연간 3.6억엔, 별도의 장기 보급 협력금은 연간 1.12억엔이다. 관전기는 양사 각각 독자적인 취재를 하고, 명인전에 대해서는 양사에서 각 1명의 부입회인을 내기로 했다.[43]
명인전・순위전을 공동 주최하는 2사의 표기 순서는 짝수 기에는 "아사히 신문사, 마이니치 신문사" 순서, 홀수 기에는 "마이니치 신문사, 아사히 신문사" 순서로 한다. 아사히 신문사가 주최하고 있는 朝日オープン選手権은 아사히 신문사의 새로운 기전 취급(계약금은 연간 8000만엔)이 되고, "朝日杯将棋オープン戦"으로 개칭되었다. 마이니치 신문사 등이 주최하는 왕장전(계약금은 연간 7800만엔)은 계속 개최된다.[43]
7. 기타
일본 장기계에서 명인전은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한다.[1] 1937년부터 실력제 타이틀로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승자에게는 '명인' 칭호가 주어지고 다음 7번기까지 타이틀을 보유한다. 2007년부터 마이니치 신문사와 아사히 신문사가 공동 주최하고, 2005년부터 다이와증권그룹이 후원한다.
원래 장기 명인은 세습제였으나,[1] 1935년 3월, 일본장기연맹 회장 가네나시 지로는 "300년간 이어진 종신 명인 제도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2]
명인전 상금은 비공개이지만, 1991년 당시 『장기세계』지에 일부 공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8]
- 대국료: 명인 1050만엔, 도전자 450만엔
- 상금: 승자(명인위 획득자) 1200만엔, 패자 300만엔
- 명인 수당: 월 약 100만엔 (명인은 순위전 대국이 없으므로 수당 추가 지급)
명인위를 방어하면 총 약 3500만엔 정도가 되는데, 이는 당시 용왕전 상금과 거의 비슷하다.[8]
1978년 NHK 특집에서 제36기 명인전을 취재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28]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29] 1984년 방송을 시작한 NHK 위성방송(BS放送)에서는 "장기 명인전"으로 1988년 제46기 순위전의 제46기 명인전 7번기 제1국 대국 시작부터 TV 중계가 시작되었다.[30] 명인전 7번기(용왕전 7번기도 마찬가지)의 모습은 2015년까지 NHK BS프리미엄(2010년까지는 NHK 위성 제2텔레비전(NHK BS2))에서 "장기 명인전"이라는 프로그램명으로 방송되었다.
명인전 도전자를 결정하는 "A급 순위전" 최종전의 생중계는 '''"장기계의 가장 긴 하루"'''라는 제목으로 2012년까지 BS프리미엄에서 장시간 생중계되었지만, 2013년에는 방송 채널을 바둑·장기 채널과 BS스카파!, 스카찬으로 이전(바둑·장기 채널 제공)하여 진행되었다.[33]
ABEMA(2017년~)에서 7번기의 완전 생중계[34]를 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바둑장기TV에서도 7번기의 완전 생중계[34]를 하고 있다. 완전 생중계 이전에는 니코니코 생방송(2012년~2019년)에서도 중계를 했다.
7. 1. 기록
명인과 도전자 간의 7번기(七番勝負) 대국은 일본 장기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한다.[1] 1937년부터 실력제 타이틀로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승자에게는 '명인' 칭호가 주어지고 다음 7번기까지 타이틀을 보유한다. 2007년부터 매일신문사와 아사히신문사가 공동 주최하고, 2005년부터 다이와증권그룹이 후원한다.원래 장기 명인은 세습제였으나,[1] 1935년 3월, 일본장기연맹 회장 가네나시 지로는 "300년간 이어진 종신 명인 제도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2] 같은 해 명인전(처음에는 8단 9명의 리그전)이 시작되었고, 1937년 12월 6일 기무라 요시오가 초대 실력제 명인으로 결정되었다. 1938년 2월 11일, 13세 명인 세키네 긴지로는 명인 자리를 반납했고, 기무라가 실력제 명인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오하시 소케이 초대 명인 이후로 이어져 온 종신 명인제가 폐지되고, 단기 실력제 명인 제도가 시작되었다.
명인전 상금은 비공개이지만, 1991년 당시 『장기세계』지에 일부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8]
- 대국료: 명인 1050만엔, 도전자 450만엔
- 상금: 승자(명인위 획득자) 1200만엔, 패자 300만엔
- 명인 수당: 월 약 100만엔 (명인은 순위전 대국이 없으므로 수당 추가 지급)
명인위를 방어하면 총 약 3500만엔 정도가 되는데, 이는 당시 용왕전 상금과 거의 비슷하다.[8]
초기에는 1기가 2년이었고, 짝수 해에 타이틀 매치를 개최했다. 그러나 1937-38년(제1기), 1943-44년(제4기), 1945-46년(제5기)에는 도전자 부재 등으로 개최되지 않았고, 제1기 및 제5기에서는 홀수 해에 명인이 결정되었다. 제5기까지 도전자 결정 리그 개최 방식이 매번 변경되었다. 1946년 "명인전" 예선으로 순위전이 시작되면서, 제6기(1947년) 이후 1기가 1년이 되었고, 도전자 결정 방법도 고정되었다.
rowspan="2"| | 획득 | 방어 | 출전 | 도전 | A급(명인 재위 포함) 재적 | |
---|---|---|---|---|---|---|
휴장 제외 | 휴장 포함 | |||||
최다 | 오야마 야스하루 총 18기 | 오야마 야스하루 총 12기 | 오야마 야스하루 총 25기 | 升田幸三|마스다 고조일본어 하부 요시하루 총 8기 | 오야마 야스하루 총 43기 | 오야마 야스하루 총 44기 |
연속 | 오야마 야스하루 13연패 | 오야마 야스하루 연속 21기 | 하부 요시하루 연속 3기 | 오야마 야스하루 연속 35기 | 오야마 야스하루 연속 44기 | |
최고속 (사단 승단 후) | 제41기 다니가와 고지 | 제42기 다니가와 고지 | 제19기 가토 히후미 | 제18기 가토 히후미 | ||
최연소 | 제81기 후지이 소타 | 제82기 후지이 소타 | 제19기 가토 히후미[21] | 제18기 가토 히후미[22] | ||
최고령 | 제51기 요네나가 구니오[23] | 제30기 오야마 야스하루[24] | 제44기 오야마 야스하루[25] | 제51기 오야마 야스하루[26] |
초기 주최는 도쿄니치니치 신문과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이었으며, 이후 두 신문사가 합병하여 마이니치 신문사 주최가 되었다. 제9기(1950년)부터 제35기(1976년)까지는 아사히 신문사가 주최하였다. 제36기(1977년)부터 다시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를 맡았고, 제66기(2008년)부터는 마이니치 신문사와 아사히 신문사의 공동 주최가 되었다.
7. 2. 방송 및 인터넷 중계
1978년 NHK 특집에서 제36기 명인전을 취재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28]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29] 1984년 방송을 시작한 NHK 위성방송(BS放送)에서는 "장기 명인전"으로 1988년 제46기 순위전의 제46기 명인전 7번기 제1국 대국 시작부터 TV 중계가 시작되었다.[30] 당시 BS방송에서는 독자적인 프로그램이 적어 기전의 TV 중계는 귀중한 콘텐츠가 되었다.[29]각 방송국의 1일차는 17:00-18:00에, 2일차는 16:00-18:00에 생방송되는 경우가 많았고, 승패 결과는 다이제스트 형식으로 2일차 밤 늦게(익일 0시대-1시대)에 약 10분간 방송되었다. 진행은 일본방송협회(NHK)의 남성 아나운서가, 해설은 기사가, 여류기사가 해설 보조를 맡는 3인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2011년에는 여류기사가 출연하지 않고, 제1국에서는 이소베 마키(장기 보급 지도원[31])가 보조를 맡은 후, 제2국부터는 남성 아나운서가 보조를 겸하는 2인 체제가 되었다.[32] 2010년도부터는 프로그램 시작과 끝에 처음으로 테마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명인전 7번기(용왕전 7번기도 마찬가지)의 모습은 2015년까지 NHK BS프리미엄(2010년까지는 NHK 위성 제2텔레비전(NHK BS2))에서 "장기 명인전"이라는 프로그램명으로 방송되었다.
또한, 이 명인전 도전자를 결정하는 "A급 순위전" 최종전의 생중계도 '''"장기계의 가장 긴 하루"'''라는 제목으로 2012년까지 BS프리미엄에서 시간을 정해 장시간 생중계가 이루어졌지만, 2013년에는 방송 채널을 바둑·장기 채널과 BS스카파!, 스카찬으로 이전(바둑·장기 채널 제공)하여 진행되었다.[33]
ABEMA(2017년~)에서 7번기의 완전 생중계[34]를 하고 있다. 또한 아사히신문 바둑장기TV에서도 7번기의 완전 생중계[34]를 하고 있다. 완전 생중계 이전에는 니코니코 생방송(2012년~2019년)에서도 중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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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山康晴・羽生善治・藤井聡太…将棋の醍醐味、テレビ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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将棋世界 2024年3月号(月刊順位戦レポート)
マイナビ出版/日本将棋連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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